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장계전쟁 (문단 편집) === 토벌령 발표 === 하지만 섭기와 하위는 말을 듣지 않고 무단 군사행위에 돌입했다. 섭기는 3월 13일 50사단을 공격, 상덕을 점령하였고 하위도 3월 17일 50사단을 호남 서북 지역 경계로 밀어붙혔다. 이에 장제스는 3월 18일 [[탕성즈]]를 하북의 바이충시 부대에 파견하여 3월 10일 영장급 회의를 통해 산둥을 통해 난징에 진공하겠다는 생각을 밝힌 바이충시의 군권을 제한하는 한편 3월 19일 섭기와 하위에게 모든 병력을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광동성 주석 겸 8로군 사령관 리지선에게 호북 문제를 논하자는 이유로 난징으로 초청한 다음, 3월 21일 리지선을 우한과 내통한 혐의로 즉시 탕산에 연금하고 10차 편견회의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섭기와 하위의 군직을 면직하는 강경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3월 26일 리지선, 리쭝런, 바이충시를 모두 면직하고 조사처분을 내리는 한편 계계군벌에 대한 토벌령을 선포, 장제스가 직접 구강으로 나아가 군함 초동호를 타고 토벌을 독전했다. 장제스는 국민정부 주석 명의로 <전 제4집단군 장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 파벌의식에 사로잡혀 파벌에 이용당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국군의 개편이 진행되고 인민이 통일과 평화를 갈망하고 있는 이때, [[리쭝런]], [[리지선]], [[바이충시]] 등 반역자는 부대를 움직여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을 소멸하려 했다. 이와 같은 반역을 용서한다면 전국의 민중과 통일을 위해 희생된 장병에게 어떻게 대할 낯이 있겠는가. 전선의 각 군은 그들을 완전히 토벌하여 법을 바로 잡아라." >---- >3월 26일 국민정부의 토벌령. 그리고 중앙군을 토역군이라 명명하여 출동시키고 1집단군 총지휘관 [[주페이더]]를 1로군 사령관, 1집단군 1군장 유치를 2로군 사령관, 2집단군 6군장 [[한푸쥐]]를 3로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10만 대군을 동원해 우한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3월 28일 장제스는 펑위샹에게도 출병하여 계계군벌을 토벌할 것을 요청했다. 무력해결에 반대하던 펑위샹은 이를 표면적으로는 수락했으나 실질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중앙군의 위세에 눌린 광서군은 우한을 포기하고 형주, 사시, 의창으로 철수했고 중앙군은 장강을 따라 전진하면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으나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 [[막스 바우어]] 대령이 호남으로 향하던 중 한커우에서 천연두에 걸려 쓰러졌고 상하이로 후송되었으나 사망했다.[* 후임 고문은 [[뮌헨 폭동]]에 참여했던 나치당원 [[헤르만 크리벨]].] 장제스는 [[장파쿠이]], [[주사오량]]에게 호종탁과 도균 등 광서파 장령들을 추격하게 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3개 로군을 동원한 토벌군이 계계군벌보다 막강한 것도 있었지만 제4집단군 전체군장 이품선(李品仙), 50사단장 이명서의 포섭 등이 성공하여 이품선이 중앙을 옹호한다고 통전하면서 광서군은 위축되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